남원의 옛 노래 김춘향전 <남원고사> 본문 속으로

본문 중에서

불과 2년 전 『남원고사』를 정독하기 전까지 나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춘향전」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다. 「열녀춘향수절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완판 84장본’과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춘향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춘향전」의 세계와 전혀 다른 『남원고사』의 면모, 인간을 보는 독특한 서술자의 시선을 읽고서야 이 작품의 진가를 얼마간 이해하게 되었다.

『남원고사』는 초기 버전에 가까운 면모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춘향전」의 대표 버전이다.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이 프랑스 파리로 옮겨 가 있다가 1970년대에 뒤늦게 그 소재가 알려지면서 즉시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나는 가장 생기발랄한 ‘야성’(野性)을 지닌 ‘김춘향’의 형상, 풍성한 디테일,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웃들, 곧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아닌 인간 군상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서술자의 시선이 좋아 『남원고사』를 「춘향전」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4-5쪽)

이 세상에 매우 이상하고 신통하고 거룩하고 기특하고 패려(悖戾)하고 맹랑하고 희한한 일이 있것다. 전라도 남원(南原) 부사(府使) 이등 사또 도임시(到任時)에 자제 이도령이 연광(光)이 16세라, 얼굴은 진유자(陳孺子)요, 풍채는 두목지(杜牧之)라, 문장은 이태백(李太白)이요, 필법은 왕희지(王羲之)라. 사또 사랑이 태과(太過)하여 도임 초에 책방(冊房)에 기생(妓生) 수청(守廳) 들이자 하니 색(色)에 상할까 염려하고, 통인(通引) 수청 넣자 하니 용의(容儀) 골까 염려하여 관속(官屬)에게 분부하되 (23-24쪽)

“소녀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춘향이요, 나이는 이팔이로소이다.”

이도령 이르는 말이

“신통하다! 네 나이 이팔이라 하니, 나의 사사 십육(四四十六)과 정동갑(正同甲)이로고나.”

또 묻되

“생월생시(生月生時)는 어느 때니?”

춘향이 대답하되

“하사월(夏四月) 초팔일(初八日) 축시(丑時)로소이다.”

“어허, 공교하다! 눈 무섭다! 방자야, 네가 아까 수군수군하더니 내나와 생일을 다 일러바쳤나 보고나. 그렇지 않으면 이럴 일이 있느냐? 대저 신통기이하다, 다 맞아 오다가 똑 시(時)만 틀렸으니! 나 해산할 제 불수산(佛手散)을 급히 달여 거꾸로 먹었더면 사주 동갑(四柱同甲)될 뻔했다. 어찌 반갑지 않으며,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72쪽)

이도령은 춘향을 “여중군자(女中君子)며 화중일색(花中一色)”이라 보아 정실부인으로는 맞지 못하나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했고, 춘향은 처음부터 이도령을 “만고영걸”(萬古英傑)이라 여겨 인연 맺을 마음을 품었으나 이도령이 변심하지 않고 백년해로하리라는 서약서, 곧 ‘불망기’(忘記)를 받아낸 뒤에야 마음을 허락했다. 순정하고 고결한 사랑과 ‘불망기’는 잘 어울리지 않고, 따라서 한국 고전소설의 전통에서도 ‘사랑의 계약’이라는 설정은 낯선 것이지만, 기생 여주인공이 사랑의 한 축으로 등장하면서 독특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475쪽)

김춘향은 애당초 이도령의 정실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도령이 출세하고 요조숙녀를 정실로 맞은 다음 자신을 잊지 말고 소실로 삼아 평생을 함께한다면 사랑의 약속은 지켜지는 것이다. 이도령은 기생 춘향을 정실로 받아들이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았다. 소실로 삼아 백년해로하겠다는 약속을 굳게 했을 뿐이다. 춘향은 이별 앞에 목숨을 끊어도 좋다고 했고, 이도령은 변치 않는 자신의 마음을 믿으라고 했다. 『남원고사』는 이처럼 사랑의 서약 장면을 「춘향전」 어떤 버전보다도 길게 확대한바, ‘사랑의 약속’에 관한 소설이라 할 만하다. (476-477쪽)

본격적인 『남원고사』 주석 작업은 1970년대 김동욱·김태준·설성경 세 분 선생의 『춘향전 비교연구』(삼영사, 1979)에서 시작되어 이윤석 교수의 『남원고사 원전 비평』(보고사, 2009)과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남원고사』(서울대출판부, 2016)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는 『고본 춘향전』을 비롯하여 가장 상세한 주석을 담은 『남원고사 원전 비평』 등 기존의 모든 주석서를 참조하면서 지금까지 의미와 출처가 밝혀지지 않았던 미상 구절에 대한 주석을 대폭 추가하고 기존 주석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구가 적지 않고, 혹 지나친 억측으로 기존의 올바른 주석을 오히려 해친 결과에 이르지 않았는지 조심스러운 바 있다. 잘못을 계속 수정하며 한국 고전소설의 걸작 『남원고사』를 정밀하게 독해하고 「춘향전」 해석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바탕이 되는 자료로 만들어 가고 싶다. (488-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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