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시대를 항해하는 책 읽기, <읽기의 최전선> 필자 소개, 차례, 본문 속으로

저자 소개

기획

서울리뷰오브북스

‘어떤’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2021년 3월 창간한 서평 전문지 《서울리뷰오브북스》는 그 답을 서평에서 찾는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한국에도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서평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탄생했다.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자연과학, 역사, 문학, 과학기술학, 철학, 건축학, 언어학, 정치학, 공학, 생물학, 법조, 북디자인, 미술 등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17명의 편집위원이 뜻을 모아 함께 만든다. 중요한 책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제대로 짚고, 널리 알려졌지만 내용이 부실한 책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주목받지 못한 책은 발굴해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필자 (게재순)

홍성욱

《서울리뷰오브북스》 첫 편집장.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기술학자. 가습기 살균제나 세월호 참사 같은 과학기술과 재난 관련 주제들, 그리고 이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1960-1980년대 산업화와 기술 발전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이두갑

서울대학교 과학학과에서 가르친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과학기술과 법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 『재조합 대학(The Recombinant University)』이 있으며 편저로 『아는 것이 돈이다』, 함께 옮긴 책으로 『자연 기계』가 있다.

조문영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저서로 『빈곤 과정』, 『‘인민’의 유령(THE SPECTER OF “THE PEOPLE”)』, 엮은 책으로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민간중국』, 『문턱의 청년들』, 『동자동, 당신이 살 권리』, 옮긴 책으로 『분배정치의 시대』가 있다.

김홍중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사회학자. 사회 이론과 문화사회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가르친다. 최근 관심은 물성(物性), 인성(人性), 생명, 영성(靈性)의 얽힘과 배치이다. 저서로 『은둔기계』, 『마음의 사회학』과 『사회학적 파상력』이 있다.

권보드래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한국 근현대문학 전공자. 현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연애의 시대』, 『1960년을 묻다』(공저), 『3월 1일의 밤』 등이 있다.

송지우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정치철학, 법철학, 인권학의 교집합에 있는 문제를 주로 연구한다.

박진호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언어학자. 서울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한국어 통사론의 현상과 이론』, 『현대한국어 동사구문사전』, 『인문학을 위한 컴퓨터』, 『디지털로 읽고 데이터로 쓰다』 등이 있다.

심채경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태양계 천체를 연구하는 행성과학자. 현재 한국천문연구원에 재직하며 달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옮긴 책으로 『우아한 우주』 등이 있다.

정우현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덕성여자대학교 약학과 교수이자 분자생물학자. 생화학, 분자생물학, 신경과학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유전체 손상과 불안정성을 일으키는 여러 요인과 생명의 다양한 대응 기전을 연구한다. 저서로 『생명을 묻다』가 있다.

박상현

전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미디어스피어 공동 창업자, 《오터레터》 발행인으로 《중앙일보》 등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 미국 정치에 관해 쓰고 있다. 저서로 『도시는 다정한 미술관』, 『나의 팬데믹 일기』가 있고, 함께 옮긴 책으로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등이 있다.

김두얼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장. 명지대학교에서 경제사, 제도경제학, 경제학 등을 연구하고 강의한다. 저서로 『경제성장과 사법정책』,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사라지는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살면서 한번은 경제학 공부』가 있다.

강예린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건축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브릭웰’, ‘미래농원’, ‘윤슬’ 등의 공간을 디자인했으며, 공저로 『도서관 산책자』, 『아파트 글자』 등이 있다.

박훈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일본 근대사를 가르치고 있다. 메이지유신, 동아시아의 정치문화 등을 연구해 왔고 한일관계사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위험한 일본책』 등이 있다.

장하원

서울대학교 과학학과에서 과학기술학을 전공했다.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 소속되어 코로나19부터 발달 장애까지 우리 사회의 질병과 장애 경험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겸손한 목격자들』, 『마스크 파노라마』,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 등이 있다.

서경

교육공동체 벗 편집부. ‘밀루’라는 이름으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등에서 활동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대학을 가지 않았다.

차례

책을 펴내며 | 홍성욱

1부 인류세를 읽다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녹색 계급 _『녹색 계급의 출현』 | 홍성욱

기후위기와 환경 재난의 자본주의 _『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 이두갑

다른 세계를 디자인하고 선언하는 인류학자 _『플루리버스』 | 조문영

김홍중 방사능 폐기물에도 불성(佛性)이 있는가? _〈체르노빌〉 | 김홍중

2부 과학기술을 읽다

인간의 조건 _『클라라와 태양』 | 권보드래 · 송지우

인공지능이 인간을 더 닮으려면? _『2029 기계가 멈추는 날』 | 박진호

우주를 보는 새로운 시선 _『관찰과 표현의 과학사』 『비욘드』 『호모 스페이스쿠스』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 심채경

유전 vs. 환경, 무엇이 웃음을 닮게 하는가? _『웃음이 닮았다』 | 정우현

3부 위험을 읽다

무해의 시대: 21세기 안전 패러다임의 계보와 전망 | 김홍중

밤길을 걷는 법: 강화길과 정세랑을 따라 길을 잃다 | 권보드래

불안한 빈자는 어쩌다 안전의 위협이 되었는가: 21세기의 빈곤 통치 _『자동화된 불평등』 『커밍 업 쇼트』 | 조문영

4부 21세기 자본주의를 읽다

실리콘밸리가 만든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 _『감시 자본주의 시대』 | 박상현

역사로 보이고 싶은 것과 역사가 말하는 것 _『21세기 자본』 | 김두얼

밀실에서 나오는 지도를 그릴 수 있는가 _『정크스페이스 | 미래 도시』 『짓기와 거주하기』 | 강예린

5부 전쟁을 읽다

인도주의는 평화를 가로막는가 _『인도주의(Humane)』 | 송지우

가족, 서로 죽이고 구원하는: 전쟁 사회의 양극적 대립을 넘어서 _『전쟁과 가족』 | 권보드래

구한말, 21세기 벽두의 데자뷔? _『러일전쟁』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박훈

6부 차별과 연대를 읽다

가난한 개인은 그 자체로 세계다 _『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 조문영

‘진짜’ 자폐인과 자폐인 캐릭터 사이에서 _『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 장하원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개신교에 대한 한 신학자의 비판 _『성서, 퀴어를 옹호하다』 | 홍성욱

‘문란한 돌봄’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_『여기는 무지개집입니다』 | 서경

본문 중에서

이 시점에서 『읽기의 최전선』을 기획한 것은 가히 시의적절하다고 하겠다. 앞만 보고 뛰어왔는데, 이제 《서울리뷰오브북스》에 실린 좋은 서평을 주제별로 묶어서 세상에 한번 내놓을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뒤도 잠깐 돌아보면서 숨을 한번 가다듬고, 새로운 미래를 기획해 보겠다는 약속이다. 여기 실린 서평들은 ‘인류세’, ‘과학기술’, ‘위험’, ‘21세기 자본주의’, ‘전쟁’, ‘차별과 연대’라는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해 독자들에게 다시 소개해 주고 싶은 글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이 글을 읽으며, 서평의 묘미와 깊이를 감미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홍성욱 「책을 펴내며」, 5-6쪽

지금의 위기, 모순, 갈등은 생산의 속도를 줄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진보 대신 퇴보, 성장 대신 탈성장, 발전(development) 대신 감싸기(envelopment)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성장을 멈추고 후퇴해야 함을 외치는 지금의 투쟁은 19세기에 자본주의가 등장했을 때의 계급 투쟁보다 더 급진적이다. 19세기의 투쟁이 생산을 그 본래 의미로 이어 가기 위한 투쟁이었다면, 지금의 투쟁은 생산을 쇠퇴시키고 우리 존재의 생성(engendering)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19세기 노동 계급이 생산수단을 탈취해서 제대로 된 생산 체계를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면, 지금의 투쟁을 주도하는 녹색 계급은 생성 체계를 지탱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홍성욱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녹색 계급」, 20-21쪽

클라인과 닉슨의 책은 기후위기와 환경 오염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키며 그 해결책을 강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책을 읽은 후에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기후위기와 환경 오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두 책은 무엇보다 극단적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무분별한 자원 채취와 오염을 통해 지구와 우리 몸에 느린, 그렇지만 거대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있다.

―이두갑 「기후위기와 환경 재난의 자본주의」, 37쪽

이 책의 독특함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복원하기 위한 도구, 전환을 위한 행위 방식과 존재 형태를 만드는 기술로서 디자인에 주목하고, 디자인의 관점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만개한 전환의 움직임을 탐구한다는 점이다. 에스코바르는 묻는다. “시장에 종속된 디자인이 형태와 개념, 영토와 물질을 지닌 창조적 실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특히 지구와 함께 호흡하는 삶을 기획하기 위해 투쟁하는 서발턴 공동체에 적합한 디자인을 설계할 수 있을까?”

―조문영 「다른 세계를 디자인하고 선언하는 인류학자」, 48쪽

〈체르노빌〉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적어도 1945년 지구상에 핵문명이 시작된 이후 지구의 생명체들은 모두 피폭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불안이다. 즉, 참사에서 죽어간 희생자들만이 피폭자인 것이 아니라, 지구적 중생(衆生) 모두가 잠재적 피폭자라는 사실에 대한 각성이다. 지구 시스템 어느 한 곳 빠지지 않고 돌아 내 코앞에 도착한 공기를 우리는 마신다. 어느 한 곳 빠지지 않고 흘러 내 손에 쥐어진 한 컵의 물을 나는 마신다. 이 광대한 물질적 순환의 흐름은 지구 위의 어떤 존재에게도 특권적 은신처를 마련해 주지 않는다. 인류세의 참된 의미는 바로 이 은신처의 불가능, 피난의

불가능성이다.

―김홍중 「방사능 폐기물에도 불성(佛性)이 있는가?」, 68쪽

인간의 마음이란 방 안에 방이 있는 것 같아서 그 복잡성을 다 파악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때 클라라가 “아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나요? 인간의 마음,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개별성이나 고유성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권보드래)

인간이 대체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어떤 면에서는 인공지능의 등장 이전에 이미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가령 노동 시장에서 일부 직군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가능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고요. ‘인간이 이렇듯 여러 의미로 대체 가능한데도 불가침성을 지니는 이유가 무엇인가’가 더 정확한 질문이지 않나 싶네요.(송지우)

―권보드래 · 송지우 「인간의 조건」, 88-89쪽

기계 학습, 그중에서도 딥러닝이 몇몇 영역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방식으로 인간에 필적하는, 또는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르다. 『2029 기계가 멈추는 날』은 바로 이 점을 힘주어 설파하고 있다. 딥러닝을 포함한 기계 학습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신중한 성찰보다는 섣부른 과장 광고가 성행하고 있는 요즘 이 책의 목소리는 더욱 소중하고 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박진호 「인공지능이 인간을 더 닮으려면?」, 108쪽

탐험의 다른 이름은 설렘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생존하기에는 너무나 불리한 우주 공간으로 뛰쳐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주 작은 소행성의 흙을 퍼오려다가 너무 큰 충격을 가해 소행성을 지구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려놓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지구에서 숱하게 경험했던 무분별한 개척과 수탈의 역사가 우주에서까지 반복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은 우주 상업화의 달콤한 열매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두려움이 덮어 버리는 모양새다. 우리는 겪어 봐서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겪어 봐야 알더라는 것을.

―심채경 「우주를 보는 새로운 시선」, 124쪽

유전적 결함은 운명을 결정짓지 않는다. 유전적 한계는 도리어 능동적으로 환경을 바꾸고 운명을 새로 개척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유전자만 전해 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게 될 새로운 환경 또한 정성껏 물려주어야 한다.

―정우현 「유전 vs. 환경, 무엇이 웃음을 닮게 하는가?」, 134쪽

비인간의 얼굴들, 도처에서 ‘우리도 살고 싶다, 죽이지 말라’고 외치는 이 얼굴들도 이제 외면할 수 없다. 고통의 자리는 역동적으로 분열되어 간다. 거기에는 절대적 경계도 없고, 특권적 위치도 없다. 더 괴로워하는 존재는 언제나 어딘가에 있으며,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무해의 시대는 고통이 회피되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껏 인정되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을 기왕의 것들과 연결하는, 강인하고 질긴 망(網)이 엮어지는 그런 시대다.

―김홍중 「무해의 시대」, 152쪽

이토록 흔한 ‘안전’과 ‘안심’이란 구호는 역설적으로 그 갈망이 충족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안전’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가령 ‘안전’의 주체로 호명되는 ‘여성’을 위해서는 치안과 성평등이, ‘청년’을 위해서는 직업과 주거 공간이 갖춰지면 되는 것일까. 함께 ‘안전’해야 할 다른 주체들의 자리는 어디 있는가. ‘안전’을 우선시하는 한 정부와 국가의 개입을, 감시와 통제와 증명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 것일까.

―권보드래 「밤길을 걷는 법」, 167쪽

불안한 삶들이 표류하는 세계다. 불안이 다른 불안을 마주하지 못할 때, 구조적 배제로든 자동화 기술로든 멀리하고 밀어낼 때, ‘안전’은 ‘위험’과 동의어가 된다. 자기 구원에 매몰된 인간들의 헛된 노력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한국어판 서문에서 실바가 던진 질문을 모두의 화두로 곱씹는 편이 낫겠다. “전 지구적 불안과 정치적 격변으로 흔들리는 시대에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집단적 동원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 단절이나 방어적인 고립에 맞설 제도들을 건설할 수 있을까?”

―조문영 「불안한 빈자는 어쩌다 안전의 위협이 되었는가?」, 183-184쪽

주보프는 감시 자본주의 자체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 온라인, 특히 소셜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여론의 분극화(polarization)를 보면 “순한 양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알고리즘이

해낸 일이다. 사회를 분열시키지만 소셜미디어 기업에게는 이익이 되는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사용자들은 이미 말을 잘 듣는 양 떼일 뿐이다.

―박상현 「실리콘밸리가 만든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 202쪽

과연 피케티는 어떻게 이런 접근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불평등에 대한 역사 자료 분석을 기초로 어떤 주장을 했을까? 그의 주장은 자신이 제시한 논리적·실증적 증거와 잘 부합할까? 이 질문들을 따져 보며 『21세기 자본』을 읽는 것이야말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책을 대하는 제대로 된 자세일 것이다.

―김두얼 「역사로 보이고 싶은 것과 역사가 말하는 것」, 207쪽

정크푸드가 영양가가 부실한 인스턴트 혹은 패스트푸드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정크스페이스는 도시나 건축의 역사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쉽고 빠르게 만들어진 공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크스페이스는 건축가의 의도와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계산이 디자인을 대신하여, 더 많은 물건의 노출과 거래와 면적을 생성한다. 외부 형태나 건물의 형식은 없고, 마치 번식하듯이 공간은 쉽게 만들어진다. (……) 쇼핑의 논리만으로 존재하는 내부 공간 혹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추상화한 것이다.

―강예린 「밀실에서 나오는 지도를 그릴 수 있는가」, 222-223쪽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적국의 모든 것을 정당한 군사 표적으로 간주하는 ‘총력전(total war)’이 난무하는

세상보다는 국제인도법이 관철되는 세상이 낫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인도주의』는 이런 상식적 판단에 어두운 이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참혹함을 최소화한 인도적 전쟁의 시대는 또한 조용하고 정밀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종착점도 없는, 영구 전쟁(forever wars)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더 나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모인에게 국제인도법이 내세우는 인도주의(humanitarianism)의 대척점은 총력전이 아니라 평화주의(pacism)이다.

―송지우 「인도주의는 평화를 가로막는가」, 239쪽

동아시아의, 한반도의, 한국 내의 문제는 (탈)식민과 (탈)냉전이 얽힌 양상으로 나날이 어지럽다. 냉전이 끝났는데 정치·경제적 격변 속 갈등만 기승스러워지다니. ‘너도 빨갱이(의 가족)인가?’라는 겁박에 모두가 시달렸던 세월을 겨우 벗어났는데, ‘좌빨’이나 ‘수구꼴통’이란 적대(敵對)의 레테르가 횡행하는 세태라니. ‘가족’은 무력하고 ‘애도’도 무기력하다. ‘진실’은 어디까지 추구돼야 하고 ‘화해’는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어지간한 지혜는 충돌의 불쏘시개감이 되고 마는 시절이다.

―권보드래 「가족, 서로 죽이고 구원하는」, 263-264쪽

한국 시민들은 나라가, 특히 국제 정세가 어려울 때면 곧잘 구한말을 입에 올린다. “구한말 때도 이랬다”든가 “정신 못 차리면 구한말 때처럼 나라 망한다”든가 하는 말들 말이다. 70년가량 버텨 온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동요하고 있는 요즘, ‘구한말’ 소리가 부쩍 자주 들린다. 그런데 구한말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인가. 무슨 일을 떠올리며 구한말을 말하는가.

―박훈 「구한말, 21세기 벽두의 데자뷔?」, 267쪽

가난과 싸워 온 사람들이 가난한 개인을 전면에 등장시켰을 때, 이 개인의 몸이 다른 사람, 사물, 법, 정책과 연결되면서 펼쳐지는 세계를 서사화·역사화할 때, 우리는 은막의 구조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배치(assemblage)를 들여다보고, 숙고의 시간을 갖는다. 거대한 불평등의 시대, 선진국 진입을 자축하는 나라에서 이 배치가 정말 최선인지, 우리가 이 배치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어떤 연결이 생명에 대한 동료 인간의 예의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조문영 「가난한 개인은 그 자체로 세계다」, 292쪽

이제는 우영우 실험이 남긴 잔상과 질문들에 집중할 시간이다. 좋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직업 세계에서 비장애인이 성장하듯 장애인도 성장하며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우영우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영우와는 다른 자폐인, 다른 장애인이라면 어떨까? 현실의 자폐인과 장애인이 사회에서 직업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마련되어야 할까?

―장하원 「‘진짜’ 자폐인과 자폐인 캐릭터 사이에서」, 303쪽

신학자 박경미는 신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모두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나는 인간의 진화 과정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모두가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동성애에 대한 최근의 과학 연구들은 성적 지향으로서의 동성애가 선천적인 유전적 요소, 태아 시기의 호르몬의 영향, 출산 초기와 영유아 시절의 환경의 복합적 영향 때문에 생기며, 개인이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적 지향이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한다고 강요한다면 이것은 폭력이자 반인권적 처사이다. 아마 예수가 살아 있다면 가장 먼저 호통치고 야단칠 대상이 지금의 한국 교회일 것이다.

―홍성욱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317쪽

나는 일생을 함께할 파트너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을 부양하거나 대리할 가족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대표로 등장하는 운동에 함께하고 싶다. 각각 혼자로 남지 않기 위해서, 혼자서도 살 만한 사회를 상상하고 요구하고 싶다. 그 ‘혼자’가 알아서 스스로 일하고 돌보는, 신용과 능력이 있는 1인 가구 모델이 아니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나눠야 할 말들이 있다고 느낀다.

―서경 「‘문란한 돌봄’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328-329쪽―서경 「‘문란한 돌봄’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328-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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