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하는 공동체 넘어서기: 공동체성이란 무엇인가(본문 속으로)

본문 속으로

‘공동체’라는 개념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미래를 상징하는 경로이자 결과를 서술하기 위해서도 쓰이지만, 많은 경우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이며 개인의 부자유에 근거한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구체적인 경험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가리키는 개념이 된다는 뜻이다. 이 이상한 개념을 낭만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배제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질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5쪽

연찬(硏鑽)은 야마기시즘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열쇳말이다. 본래 ‘학문 따위를 깊이 연구’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한 연찬은 야마기시즘에서 의사결정 방식이자 생활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사유 방식으로서 작동한다. 야마기시즘의 연찬이 단순히 소통 방법이나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방식으로 역할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야마기시즘 연찬이 강조하는 인식론에 있다. 우선, 야마기시즘의 연찬 방식은 ‘누가 옳은가?’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탐구하는 과정이고, 모든 지식과 정보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최선의 결론을 도출하는 사유 방식이다. ―37-38쪽

언제부터였을까, 공동체는 제도의 혁신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민간 영역뿐 아니라 제도의 틀 안에서도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더 나은 미래로 가는 지름길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시민운동이 중앙정부에 요구했던 내용들이 수용되기 시작하여 풀뿌리운동이 주목받은 맥락과 유사한 흐름이었을 수도 있다. ―81쪽

정주하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민’으로 초대되기 어렵다.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관계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경제적 이해관계’ 속으로 진입할 권리, 즉 정주와 소유가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해관계에 진입하지 않아도 지역의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장치와 구조,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 중요한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85-86쪽

커먼즈는 도처에 존재한다. 공기, 물, 햇빛, 바람, 산, 들, 갯벌, 바다 등 우리 주변의 많은 것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어주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커먼즈이다. 그래서 생명과 자연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도 하고, ‘순수증여’라고도 한다. 이에 대한 공유 활동은 다양한 비물질적인 공유자산을 만들어 냈다. 집단지성, 생태적 지혜, 일반지성이 그것이다. 이 역시도 커먼즈를 이룬다. 왜 굳이 커먼즈를 새삼스럽게 얘기하는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자연과 생명이라는 커먼즈의 약탈이 심각해지면서, 이에 대한 커머닝 즉 공유 활동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114쪽

최근에 플랫폼자본주의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릴 정도로 플랫폼이 전면화되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은 플랫폼과 커먼즈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플랫폼자본주의 양상은 플랫폼이라는 마당을 설정해 두고, 그 안에서 사랑, 욕망, 정동, 재미 등을 발휘하면서 그 이익과 부수효과가 행위를 한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 플랫폼을 살찌우도록 만드는 바로 향하는 색다른 질적 착취 양상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커먼즈와 플랫폼이 각종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공동의 시민자산으로 향하느냐 아니면 사적 자본의 이익으로 향하느냐의 문제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118-119쪽

앞서 이태영 님은 “누가 주민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공동체에서는 배치를 형성할 수 있는 모든 인간/비인간 존재가 바로 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배치(agencement)라는 개념은 공동체의 관계망과 위상 등과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치를 살핀다는 것은 자신이 선 자리와 위치, 사물, 자연, 생명과의 관계 맺음을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치는 공동체적 관계망이 갖고 있는 다채로운 접촉경계면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하나의 조감도와 같이 장소, 관계, 의미, 정동을 살필 수 있는 관계성좌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139-140쪽

‘공동체’ 자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태도, 그리고 공동체 그 자체가 대안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 환상은 공동체 공간을 탈정치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야마기시즘이 지향한 ‘연찬 생활’은 고도의 직접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의 공동체적 운영이라는 대단히 정치적인 기획이었지만, 실현지가 운영되는 과정에서 연찬은 자꾸 정치를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기술로

작동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대단히 정치적인 기획과 대단히 탈정치적인 시도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187쪽

공동체 역시 이 난감한 시대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 현재 존재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며 생태적인 위기를 진단한 이들이 손쉽게 ‘공동체’를 미래적인 대안으로 제안하는 것에 대해 나는 우려를 갖고 있다. 공동체는 진공 상태의 대안일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의 기능을 부정하고 그 가능성을 기각한 이들이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없다. 대안은 이전의 문화나 제도와 단절된 형태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 속에서 한발 나아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나는 공동체가 2020년대에 우리가 마주한 여러 가지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단절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낭만화된 유토피아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189-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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